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 영화/역사 (문단 편집) === [[2000년]]~[[2002년]] === [[1999년]]에 개봉된 《쉬리》에 이어 또 한번 히트를 거둔 《[[공동경비구역 JSA]]》가 20세기 한국영화를 마무리 했다. [[2000년]] 즈음부터 영화관이 멀티플렉스 체제로 개편되어 대단위 관객 수용이 가능해졌다. [[1990년대]] 초반에 10% 중순까지 추락하고 [[1990년대]] 중후반에도 20%대에서 답보하던 자국영화 점유율이 《쉬리》의 흥행을 시작으로 하여 30% 중후반대를 기록했고, 특히 [[2001년]]에 점유율 40%를 넘어 '''점유율 50%'''까지 달성하게 되었다. 불과 3여년 전까지만 해도 IMF 외환위기로 대기업들이 영화산업에서 철수했던지라 한국영화계 역시 그 영향을 받을것이라는 예상이 강했지만 예상을 깨고 멀티플렉스의 보급으로 영화시장이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커지게 되었고 멀티플렉스 체인들이 이전의 상당수 단관극장들처럼 단순히 해외영화 수입에 치중하는것을 넘어서 한국영화도 돈이 된다는 인식으로 한국영화 제작에도 어느정도 나서게 되면서 예상을 깬것이었다. 특히 당시 주변국들의 사정과도 대조적이라서 화제가 되었고, 해외 영화계에서도 자국영화 산업 발전의 대표적인 예로 주목받게 되었다. [[2000년대]] 초반의 상황을 보면 [[대만 영화]]와 몽골 영화는 완전히 몰락해서 영화감독들이 겨우 영화를 만든다해도 극장에다가 영화를 거는건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힘든 암울한 시절이었고, [[홍콩 영화]]와 [[일본 영화]]는 침체일로에 빠져서 점유율이 20%대까지 추락했으며 [[러시아 영화]]는 불과 몇년전에 영화관 관객수가 기록적으로 줄어들고 그나마도 영화를 보는 관객도 할리우드 영화가 그 자리를 차지해서 영화를 걸기 힘든 막장상황이었다가, 겨우겨우 회생의 길로 들어서던 참이었고, [[중국 영화]]도 TV의 보급과 함께 불법복제 VCD, DVD가 판을 치는 바람에 벌어진 영화관 관객수의 감소로 인해 역시 침체에 빠져있던 것은 매한가지였다.[* 이러한 사정이 나아지기 시작한것은 [[2000년대]] 중후반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하고, 중국인들의 소득수준이 중진국 수준에 다달은 뒤부터였다.] [[일본 영화]]가 도전자로서 본격적으로 개봉에 들어갔지만, 우려와는 달리 이쪽은 [[일본 만화]]에 비해 쪽도 못 쓰고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다만 이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흐름과 맞물린 결과이기도 하다. [[1990년대]] 말부터 이루어진 대중문화 개방단계에서 일본영화는 초기 예술영화위주로 개방되고 이후 상업영화가 추가되는 수순이었는데, 덕택에 초기에 수입된 일본영화는 《[[하나비]]》나 《[[카게무샤]]》 같은 예술영화들이었다. 애초에 대중성이 거의 없는 분야. 이후 대중성 위주의 《[[러브레터]]》가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대박까진 아니지만...] [[2001년]]에는 친구가 19세 영화인데도 비공식 800만명을 모아서 쉬리를 뛰어넘는 흥행과 시대유행을 이끌어 냈다. 인프라가 아직은 부족한 때라서 이후 시대에 보정하면 1500만 이상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 였다. 또 비록 흥행은 시원찮았지만 작품성에 있어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던 영화들이 많이 등장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라이방》, 《나비》, 《[[고양이를 부탁해(영화)|고양이를 부탁해]]》 등이 대표적인데, 특히 이 4작품은 독특한 작품성으로 적지 않은 컬트팬들을 양산하였다. 덕분에 이 영화들의 재개봉을 청원하는 일명 "와라나고운동"이 일어나기도 할 정도의 반향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